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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상홍 교수의 인생론⑤ 다산의 벼슬 11년간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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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홍
기사입력 2021-02-02

 

 

 

다산 정약용(17621836)11년간 벼슬하면서 발상을 전환하여 공렴(公廉)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공렴은 성품과 행실이 공평하고 청렴(Integrity)하며 강직함을 뜻한다.

 

다산이 벼슬한 것은 28(1789, 정조 13)부터 38(1799, 정조 23)까지 11년이다. 28세때 310일 전시 갑과(甲科) 2위로 과거에 합격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이 되었다. 29세에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이 되고, 31(1792)에 정조의 명으로 발상을 전환하여 수원화성 건설에 크게 공헌했다.

 

33세에 경기도 암행어사, 34세에 병조참의, 366월에 동부승지, 황해도 곡산도호부사가 되었다. 384월에 병조참지, 5월에 동부승지, 형조참의(현 법무부 차관보)가 되었으나 621일 민명혁이 배척 상소하자, 다산은 다음날 사직상소를 하여 726일 윤허로 물러났다. 다산은 정조의 지극한 지우(知遇)를 입었으나 공서파의 집요한 공격으로 벼슬생활이 편안하지 못했다.

 

벼슬한 11년간의 주요업적을 보자.

다산은 배다리(舟橋) 건설에 참여. 정조는 178912월에 주교사를 설치했다. 경기도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부근)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 현륭원을 조성했다. 다산은 1789년 겨울 주교의 역사에 참여했다.

 

다산은 성곽 건축가이자 발명가. 발상의 전환으로 수원화성 건설에 공헌했다. 정조는 1792년 다산에게 수원 화성설계를 명했다. 벼슬 3년차인 31세의 다산은 수원성제기중가설도를 올렸다. 다산이 제작한 거중기는 40근의 힘으로 25,000근을 들어올렸다. 당시 거중기는 최첨단 건설장비로 건축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용을 절약하고 공사 인력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수원성은 단 34개월(중간 6개월 정역(停役)을 생각하면 28개월)만에 완공, 179610월 낙성연을 치렀다.

 

신도시 건설을 2년 반 만에 끝낸 것은 건축장비의 덕이었다. 총공사비는 873,520냥이다. 정조는 거중기를 써서 4만냥을 절약했다며 다산을 치하했다. 4만냥은 4.6%로 큰 금액이다. 수원화성은 1997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다산의 위대함이 재차 입증된 것이다.

 

 

▲ 개혁왕 정조와 실학자 다산이 건축한 수원화성.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편집인

 

 

다산은 훌륭한 암행어사. 33(1794)때인 1029일 경기암행어사가 되어 적성현, 마전군, 연천현, 삭령군을 염찰하고 1115일에 복명했다. 전 연천현감 김양직과 전 삭령군수 강명길의 비리를 처벌했다. 또한 후일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 17571824)의 가인(家人)이 명당인 마전향교 자리를 정승집의 묘소로 쓰게 하려고 선비들을 협박해 이전시킨 것을 적발하고 처벌했다. 이로 인하여 서용보는 평생 다산을 질시하고 모살(謀殺)하고자 했다.

 

정조가 다산을 꽃 피게 했다면 서용보가 그 꽃을 무참히 짓밟았다. 암행어사의 임무를 마치고, “백성을 중하게 여기고(以重民生) 국법을 존중해야 한다(以尊國法)”고 건의했다.

 

다산은 시인으로 조선후기 문단발전에 기여. 다산은 학문이 연박(淵博)했던 정조와 문임제신들로부터 문원(文苑)의 기재, 기재시인, 천재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35세 때 문학 써클인 죽난시사(竹欄詩社) 결성을 주도했다. 동인은 30대 관료문인 15명으로 초계문신 출신자가 9명이다.

 

다산의 인문정신이 구현된 이 시사의 정기적인 시회(詩會)살구꽃 피면 열고, 복숭아꽃 피면 열고, 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열고, 서쪽 연못에 연꽃 피면 열고, 국화꽃 피면 열고, 겨울에 큰 눈 내리면 열고, 세모에 화분에 매화가 피면 열었다. 비정기적인 시회는 득남한 자가 열고, 지방관이 된 자가 열고, 승진한 자가 열고,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면 열었다. 시회를 여는 동기가 매우 낭만적이고 운치가 있다. 죽난시사는 정조시대의 문단을 대표하는 시사이다.

 

다산은 훌륭한 목민관. 36세 때(1797) 6월에 황해도 곡산도호부사로 부임했다. 2년간 재임하면서 포척(布尺)을 바로잡아 중간협잡 방지, 물가 안정책으로 백성들의 고통 제거, 농가 마다 송아지를 기르게 한 축산장려 정책실시, 창곡(倉穀)의 이용을 고르게 하기 위해 일시에 수송 분배, 호적, 경계(經界), 첨정 등 사무정리, 호포 남용 시정, 홍역 치료책인마과회통 저술, 외교업무인 청나라 사신 영접, 도내 수령들의 선악을 염찰, 도내의 의옥(疑獄)을 심리 판결 하는 등 10대치적을 남겼다. 그는 목민관의 롤 모델이다. 곡산부사의 경험은 후일 목민심서흠흠신서를 저술하는 기초가 되었다.

 

다산은 명재판관. 황해도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농민 이계심(李啓心)은 전관(前官) 때에 포수보(砲手保) 면포 1필을 돈 9백전으로 대징(代徵)하자, 백성 1000여 명을 이끌고 항의하여 수배자가 되었다. 그런데 다산이 부임하는 길목에 이계심이 갑자기 나타나 백성을 괴롭히는 10여 가지를 적은 문서를 전하고 자수했다.

 

다산은 관청이 현명하지 못한 까닭은 백성이 자신을 위한 계책을 잘하여 폐단을 들어 관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으로 사들여야 할 것이다(如汝者官當以千金買之也)”라고 무죄 판결했다. 놀라운 사상이자 명판결이다.

 

다산은 명의(名醫). 곡산부사 재직시절인 1797년 연구를 거듭하여 홍역으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들을 살리려고 마과회통 편찬했다. 다산의 뜨거운 애민사상의 실천이다.

 

다산은 명수사관. 38(1799) 때인 55일 형조참의가 되었다. 죄수 함봉연(咸奉連)이 살인사건에 연루 되어 7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고 무죄임을 밝혀내 석방시켰다. 7년 미제사건을 단숨에 해결한 명수사관이었다. 이외에도 다산은 정조의 문예부흥 정책의 일환인 서적 간행에 참여하여 오경백선, 두시,사기영선등을 교정하였다.

 

다산의 11년간 벼슬하는 동안 이와 같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공렴(公廉)했고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융합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김 상 홍(단국대학교 전 부총장 ·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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